“식량위기 닥친 뒤엔 늦다”…평시 생산기반 지킬 ‘식량안보법’ 시급
“식량위기 닥친 뒤엔 늦다”…평시 생산기반 지킬 ‘식량안보법’ 시급
  • 김현옥 기자
  • 승인 2026.09.0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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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자급률 21.6%·GFSI OECD 최하위권…돈 있어도 식량 못 사는 공급망 위기 현실화
허등용 경북대 교수 “자급목표·농지·비축에 재정 의무화…법·지표·위기경보 하나로 묶어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주최 '식량안보 대응체계 강화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성공적인 '식량안보법' 제정을 위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김판제 aT 식량지원부장, 임병희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 사무총장, 김동현 농식품부 식량정책과장,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 유찬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사, 허등용 경북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 문한필 전남대 농업경제학과 교수, 이승재 풀무원식품 상무, 소윤철 이지홀딩스 이사, 박향섭 aT 식량관리처장)

기후위기와 전쟁, 수출통제 등으로 세계 식량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식량안보 정책의 무게중심을 ‘위기 발생 후 대응’이 아닌 ‘평시 생산기반 유지’에 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식량안보법에 자급 목표와 농지 보전, 비축, 해외 조달 등의 근거를 담는 데 그치지 않고 매년 필요한 재원을 예산에 반영하도록 해야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곡물 소비량의 약 80%를 해외에 의존하면서도 식량안보와 식량안보 위기에 대한 법적 정의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정책은 여러 법률에 분산돼 있고, 실제 위기 발생 시 정부가 생산·수출입·유통에 개입하거나 민간의 손실을 보상할 법적 근거도 충분하지 않다.

최근 식량안보법을 주제로 관련 토론회가 세 차례나 열릴 정도로 국회와 정부, 농업계의 관심이 높아진 이유다.

허등용 경북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3일 서울 양재aT센터 세계로룸에서 주최한 '2026 식량안보 대응체계 강화를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허등용 경북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식량안보법 제정과 위기 대응 체계 구축을 위한 정책 방향’ 발표를 통해 “식량안보법의 실질적인 무게중심은 위기 대응보다 평시에 안정적인 식량 공급 기반을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며 “평시의 기반을 구축하고 위기가 발생하면 법률에 따른 대응 체계가 발동되는 구조로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곡물자급률 21.6%…밀은 0.8%에 불과

허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장기적인 하락 흐름을 보이고 있다. 곡물자급률은 2005년 29.3%에서 2010년 27.6%, 2015년 23.8%, 2020년 20.2%까지 떨어졌다. 2024년 21.6%로 소폭 반등했지만 여전히 전체 곡물 소비량의 약 80%를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다.

품목별 상황도 녹록지 않다. 2017년과 2024년을 비교하면 콩 자급률은 51.9%에서 47.9%, 쌀은 103.4%에서 95.0%, 보리는 26.0%에서 22.0%, 밀은 1.0%에서 0.8%로 하락했다.

국제 비교에서는 취약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2021∼2023년 평균 곡물자급률은 한국이 20%인 데 비해 일본 28%, 중국 92%, 독일 122%, 캐나다 170%, 미국 339%로 나타났다. 세계 평균은 101%다.

국내 생산기반도 빠르게 약화하고 있다. 2025년 경지면적은 149만㏊로 정부 목표선인 150만㏊ 아래로 내려갔고, 농가인구 역시 198만 명으로 200만 명 선이 무너졌다. 65세 이상 농가인구 비율은 2025년 56.0%에서 2026년 56.6%로 높아질 전망이다.

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생산 확대를 결정하더라도 농사지을 땅과 사람이 없다면 정책이 현장에서 작동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돈이 있어도 못 산다”…식량도 전략안보 자산

국제 식량위기의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식량위기를 개발도상국의 빈곤이나 인도주의 문제로 인식했지만, 이제 식량은 에너지와 반도체, 희토류처럼 국가안보와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중동지역 긴장, 이상기후, 물류 차질, 경제 불안, 주요 생산국의 수출통제가 동시에 발생하면서 위험도 복합화하고 있다. 인도가 자국 물가와 수급 안정을 이유로 쌀 수출을 제한한 것처럼 생산국들이 자국 수요를 우선하면 국제시장에서 곡물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충분한 외화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필요한 식량을 제때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국제평가에서도 우리나라 식량안보의 구조적 취약성이 확인됐다. 2022년 세계식량안보지수(GFSI)에서 한국은 113개국 가운데 39위로 OECD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2012년과 비교하면 18계단 하락했으며, 식량안보 전략 항목의 평가 점수는 0점이었다.

농림축산식품부 예산이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6년 3.7%에서 2026년 2.8%로 줄었다. 농림어업의 국내총생산(GDP) 비중도 2014년 2.3%에서 2024년 1.6%로 낮아졌다.

허 교수는 우리나라가 생산기반 약화와 국제 공급망 불안, 기후변화에 따른 불확실성, 국내 농업의 위상 하락이라는 ‘사중고’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흩어진 식량정책 한 법에…“선언 아닌 예산이 관건”

현재 우리나라에는 식량안보와 관련한 정책이 여러 법률에 분산돼 있다. 자급 목표와 비축, 유통, 농지 보전 정책을 식량안보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조정할 기본법도 없다.

반면 다른 경제안보 분야에는 '국가자원안보 특별법'과 '공급망안정화법' 등 위기 발생 시 정부가 신속하게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다.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식량 분야에만 독립적인 대응 체계가 없다는 지적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식량안보를 국가 전략으로 법제화하고 있다. 일본은 2024년 6월 '식량공급곤란사태대책법'을 제정했고, 중국도 2023년 12월 '식량안보장법'을 마련했다.

국내에서도 대선 공약으로 식량주권법이 제시됐으며, 국회에서는 서삼석·윤준병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정부 검토안까지 마련되면서 입법을 위한 기본 여건은 갖춰졌다는 평가다.

허 교수는 식량안보법이 제정된다면 자급 목표를 법률에 명시하는 수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목표 달성에 필요한 재원을 매 회계연도 예산안에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률에는 농지 목표면적 유지와 생산 투입재의 안정적 공급, 가격·수급 안정, 정책 대상 작물 육성 등의 근거도 포함해야 한다. 비축은 원칙을 법률에 담고 구체적인 규모와 대상은 하위 법령에 위임하되, 비축 적정성을 주기적으로 검토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해외농업개발은 과거 정부 주도 사업의 한계를 고려해 ‘민간 중심·정부 지원’을 원칙으로 삼고, 수입국 다변화와 연계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국민이 충분하고 안전하며 영양가 있는 식량에 접근할 권리와 식량 관련 기술개발, 친환경 농업 등 지속가능성 확보 방안도 법률에 함께 담아야 할 과제로 꼽혔다.

‘관심-주의-경계-심각’…위기 대응 7단계 가동

식량안보법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평시 모니터링부터 위기 판단과 경보 발령, 정부 개입, 손실보상, 기금 투입까지 전 과정이 하나의 체계로 연결돼야 한다.

허 교수가 제시한 위기 대응 체계는 7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에서는 식량 수급을 상시 모니터링하고 식량안보지표를 활용한 조기경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2단계에서는 위기 수준을 ‘관심-주의-경계-심각’의 4단계로 구분해 경보를 발령한다.

3단계에서는 상황에 따라 관계 부처 단위에서 국무총리 단위로 격상할 수 있는 대책본부를 운영한다.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뿐 아니라 중점 식량공급사업자에게도 협력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단계에서는 생산과 수출입, 유통 조정 등의 조치를 시행한다. 이 과정에서 민간사업자의 협조를 확보하고 재산권 침해 논란을 줄이려면 손실보상 근거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5단계에서는 농지법 등 관련 규제를 기간·지역·품목에 따라 한시적으로 완화하고, 6단계에서는 긴급 식량 확보와 복구·보상에 필요한 기금을 투입한다. 마지막 7단계에서는 정기적인 대응 훈련과 위기 매뉴얼을 운영한다.

다만 식량안보위원회의 소관과 비축 규모의 법정화, 다른 법률에 대한 특례, 기금 신설 등은 입법 과정에서 풀어야 할 쟁점으로 남아 있다.

허 교수는 식량안보의 위상과 부처 간 조정 능력을 고려할 때 식량안보위원회를 국무총리 소속으로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다. 비축 규모는 법률에 직접 못 박기보다 관계 법령에 위임하되 적정성 검토를 의무화하는 절충안을 제안했다.

기금의 경우 우선 임의조항으로 반영하고 중장기적으로 의무조항으로 전환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고 설명했다.

식량안보지표, 평가자료 아닌 예산 배분 기준으로

식량안보지표도 단순한 조사·평가 자료에서 실제 정책을 움직이는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법률에 지표의 개발·관리와 진단·고시 의무를 규정하고, 3∼5년마다 전문가 패널을 다시 구성해 가중치와 세부 항목을 재검토해야 한다.

부처별로 분산된 데이터를 통합해 위기경보 체계와 공유하고, 지표 분석 결과를 다음 연도 기본계획과 예산 편성에 의무적으로 반영하는 정책 환류 구조도 필요하다.

전국 단위 지표에 그치지 않고 농지와 고령화, 기후 취약성의 지역별 차이를 반영할 수 있도록 광역지방자치단체 단위의 세부 지표를 개발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허 교수는 “식량안보지표를 일회성 연구가 아니라 법률과 예산에 따라 움직이는 상시 정책 도구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입법 속도보다 작동하는 법”…평시 생산기반이 성패 좌우 

허 교수는 식량안보법 제정과 관련해 다섯 가지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먼저 입법 속도보다 실효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축과 법적 특례, 기금 등에 대한 실질적인 합의 없이 쟁점을 봉합하면 법률이 사문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법률의 무게중심은 평시 생산기반에 두고 자급 목표와 농지 보전 정책에 필요한 재정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식량안보지표와 법률, 위기경보도 개별적으로 운영할 것이 아니라 데이터와 판단 기준, 정책 환류가 하나의 순환 구조를 이루도록 설계해야 한다.

비축 대상은 사료곡물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민간 중심의 해외농업개발을 병행해야 한다. 전략작물직불제의 생산 유인과 생산단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도록 판로·가공 지원을 강화하고 청년농 유입 정책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

허 교수는 “법과 지표, 재정, 거버넌스를 하나의 순환 구조로 연결해야 정책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식량안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 전략 과제”라고 강조했다. <관련 토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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