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맥 15.2% 내릴 때 밀가루 20.3% 올라"…피해 규모 산정·공표, 집단소송제 도입 요구
설탕·밀가루·전분·전분당 등 밥상물가를 좌우하는 기초 식품 원재료 시장에서 대규모 담합이 반복되고 있지만, 정작 비싼 가격을 부담한 소비자는 피해 규모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보상에서도 배제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기업에는 수천억원대 과징금이 부과되지만 담합의 실질적 피해자인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직접적인 구제 수단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특히 국제 원재료 가격이 하락하거나 안정된 기간에도 밀가루와 설탕 가격은 큰 폭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나 정부의 관세 인하와 할당관세 등 원가 부담 완화 정책이 실제 소비자가격 안정으로 이어졌는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회장 문미란)는 14일 설탕, 밀가루, 전분·전분당 제조업체의 담합과 관련해 소비자 피해 규모를 객관적으로 산정·공표하고 피해 소비자가 직접 보상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소비자단체협의회는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생활필수품의 기초 원재료인 설탕과 밀가루, 전분·전분당 제조업체의 담합을 적발하고 과징금을 부과한 데 대해서는 환영하면서도 "과징금 부과가 실제 피해를 입은 소비자의 권익 회복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20년 전 담합 제재받은 설탕·밀가루…2026년 또 적발
문제는 식품 기초 원재료 시장의 담합이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설탕 제조업체 3개사는 1991년부터 2005년 9월까지 이어진 담합으로 2006년 적발돼 약 51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밀가루 시장 역시 8개 업체가 2000년 1월부터 2006년 2월까지 담합한 사실이 적발돼 약 43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바 있다.

그러나 약 20년이 지난 2026년 설탕과 밀가루 시장에서 또다시 담합이 적발됐다.
설탕 제조업체 3개사는 2021년 2월부터 2025년 4월까지 담합해 약 4,083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밀가루 제조업체 7개사의 2019년 1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담합에는 약 6,710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전분·전분당 시장에서도 4개 업체가 2018년 5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담합한 사실이 적발돼 약 7,47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2026년 적발된 설탕·밀가루·전분 및 전분당 담합에 부과된 과징금만 단순 합산해도 약 1조8,269억원에 달한다.
소비자단체협의회는 "설탕과 밀가루 제조업체들은 약 20년 전에도 담합으로 제재를 받았지만 2026년 다시 담합으로 적발됐다"며 과징금과 형사처벌 중심의 현행 제재가 실제 담합 억지력을 갖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담합 매출·과징금은 공개하면서 소비자 피해액은 왜 모르는가"
소비자단체가 특히 문제 삼은 대목은 담합으로 발생한 '소비자 피해 규모'다.
공정위는 담합 사건을 발표하면서 관련 매출액과 과징금 규모를 공개하고 있지만, 해당 기업이 담합으로 취득한 부당이익이나 소비자가 추가로 부담한 경제적 피해 규모는 별도로 산정·공표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부과된 과징금이 기업이 담합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보다 실제로 많은지, 담합을 억제할 만큼 충분한 수준인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 소비자단체의 주장이다.
최근 공정거래법 관련 고시 개정으로 담합 과징금 하한이 0.5%에서 10%로 상향되고 반복 위반 사업자에 대한 처벌도 강화됐지만, 소비자 피해구제 장치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경쟁법 위반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의 손해배상 청구제도가 적극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통해 담합 피해 구제와 불법행위 억지력을 높이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소비자가 담합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개별 소비자가 피해 사실과 손해액을 직접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크다. 집단적 피해구제 제도 역시 제한적이어서 실제 소비자 배상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소맥 15.2% 내렸는데 밀가루 20.3% 올라…설탕은 37% 상승
원재료 가격과 소비자가격의 엇갈린 흐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소비자단체협의회 분석에 따르면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했던 2022년 이후 주요 원재료 가격이 하락하거나 안정세를 보였지만 이를 사용하는 가공식품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2022년 1분기와 2025년 4분기를 비교하면 소맥 가격은 15.2% 하락했지만 밀가루 가격은 오히려 20.3% 상승했다. 같은 기간 원당 가격은 7.8% 상승하는 데 그쳤지만 설탕 가격은 37% 올랐다.

전분당 가격 상승 폭도 컸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전분당 가격은 2022년 기준 2018년보다 73% 인상됐다. 전분당은 제과·제빵부터 음료·주류, 빙과, 캔디, 소스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핵심 원재료다. 원료 가격 인상은 특정 제품군에 그치지 않고 식품과 외식 등 생활물가 전반으로 파급될 가능성이 크다.
소비자단체협의회는 "원가 하락에 따른 효과가 소비자에게 충분히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관세 낮춰 기업 원가 부담 덜었는데…소비자가격 안정 효과는?
정부의 물가 안정 지원정책에 대한 사후 검증 필요성도 제기됐다.
정부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식품물가 부담에 대응하기 위해 할당관세 확대와 관세 인하 등 식품기업의 원가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업의 원료 조달 비용을 낮춰 소비자가격 인상 압력을 완화하는 데 있다.
그러나 담합이 이뤄진 기간 정부의 원가 부담 완화 정책이 동시에 시행됐다는 점에서 지원 효과가 실제 소비자가격 안정으로 이어졌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소비자단체협의회는 "업체들의 담합은 정부의 원가 부담 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식품뿐 아니라 외식 등 생활물가 전반의 가격 상승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가 기업을 대상으로 관세 인하와 할당관세 등 원가 지원정책을 시행할 경우 해당 지원이 실제 제품가격 안정과 소비자 혜택으로 연결됐는지 사후 점검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담합 피해액 공개하고 소비자에게 돌려줘야"
소비자단체협의회는 이제 담합 정책의 초점을 '기업 처벌'에서 '소비자 피해 회복'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설탕과 밀가루, 전분·전분당은 수조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면서 가공식품과 외식 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초 원재료다. 이들 시장의 담합은 단순한 기업 간 경쟁질서 훼손을 넘어 국민 전체의 먹거리 비용을 높이는 중대한 불공정행위라는 주장이다.
이에 정부가 담합 기업이 취득한 부당이익과 소비자가 입은 경제적 피해 규모를 객관적으로 산정해 공개하고, 생활밀착품목의 가격 형성 과정과 정부 지원정책의 효과를 종합적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피해구제기금 등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보상이 돌아갈 수 있는 제도 도입도 제안했다.
소비자단체협의회는 "담합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실질적으로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도록 피해구제기금 마련 등을 통한 실효적인 소비자 피해구제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며 "집단소송제를 조속히 도입해 집단적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소송을 통해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