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양희의 수다 in Jeju] -제주나물이야기_제피
[류양희의 수다 in Jeju] -제주나물이야기_제피
  • 제주=류양희 통신원
  • 승인 2020.10.20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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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피'의 사투리...일조량 많은 지역기후탓 벌레꾀는 고추 대신 많이 쓰인 향신료
생선국·물회 등 비린내 잡내 잡는데 쓰여...고추 도입 후엔 사용 안해 낯선 식재료
'제피지' '제피썹지' 등 잎과 열매 활용한 나물과 장아찌는 밥반찬으로 인기 만점
김치 담글때 고추 대신 사용하면 풍미 더하고 동의보감엔 식중독 예방 효과 기록

아침엔 늘 시간에 쫓기다보니 양치질에도 과속을 하게 된다. 이를 닦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데,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는 ‘분노의(?) 칫솔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게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양치질하다 까딱 잘못해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는 날에는 칫솔이 잇몸을 쿡 찔러 결국 피를 보고 만다. 그 상처가 피곤한 일상과 겹치면 궤양으로 커지는데 며칠 동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심한 경우엔 눈물까지 찔끔 날 정도다. 그 상태에선 밥을 먹을 때가 가장 고통스럽다. 각종 자극적인 양념이 상처를 들쑤셔놓는데 밥은 먹어야겠고 입속은 찢어질 듯-이미 찢어진 상태에서 더 찢어질 듯-아프고 진퇴양난이다.

예전에 딱 그 상태에서 이탈리아 출장을 갔었다. 고된 일정에 낯선 음식이 입맛에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입 속까지 그 모양이니 고생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생각 밖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입속 상처가 빠른 속도로 나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입 속이 그 정도인데 음식먹는 것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그만큼 이탈리아의 음식이 자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세계적으로 고추를 생으로 먹는 나라가 드물단다. 고추장을 먹는 나라는 더더욱 드물단다. 다 매워서 그렇단다. 그런데 생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단다. 그만큼 우리의 지독할(?) 정도로 자극적인 식습관을 빗댄 얘기일 것이다.

몇 차례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된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음식에 고루 쓰이게 된 것은 더더욱 얼마 안됐다. 그러니 가끔 조선 초기나 그 이전 시대를 다룬 사극 드리마에서 고춧가루가 섞인 음식이나 고춧가루 양념이 된 오늘날의 김치가 올려져있는 모습은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

제주에서는 일조량이 많아 당도가 높은 고추엔 늘 벌레가 들끓었다. 그러니 제주에서는 고추가 도입된 이후에도 뭔가 다른 향신료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제피’였다.

초피나무와 열매(출처_나무사랑원예 업체홍보사진)<br>
초피나무와 열매(출처_나무사랑원예 업체홍보사진)

‘제피’의 표준어는 초피(椒皮)다. 이를 두고 호남에선 ‘젠피’라고도 부르고 북한에선 ‘조피’ ‘지피’ ‘진초’라고도 부른다. 이를 영남지방이나 충청지역, 그리고 제주에선 ‘제피’라고 부른다. 고추가 고초(苦椒)에서 변형된 말이고 고초를 당초(唐椒) 번초(蕃椒)라고도 불렀는데 여기서 동일하게 들어가는 ‘초’가 바로 초피의 그 ‘초’다. 이 ‘초’는 산초나무 ‘초(椒)’인데 산초와 초피는 아주 흡사해 사촌격으로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엄연히 다르다. 주로 중부지방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산초가, 남쪽에는 초피가 많다. 주산지인 남쪽에서는 초피보다 제피라는 말을 더 많이 쓰니 실제로 ‘제피’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

초피에 ‘초’자가 들어가는 걸 봐서 기본적으로 매운맛을 뜻한다. 거기다가 신맛도 난다. 그 향이 강렬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그런데 그 향 때문에 음식에 자주 쓰이는 것이다. 초피의 사전적 의미는 초피나무 열매의 껍질을 뜻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초피나무의 잎이나 열매, 열매 껍질 모두 그저 초피, 제피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리돔 이야기 때 언급한 바 있지만 자리물회에 제피를 넣는 걸 보았다. 함께 식당에 간 일행들은 서울 사람 입맛에는 제피가 안 맞을 수도 있으니 제피를 넣지말고 자리물회를 해달라는 이야기를 해서 제피를 눈으로만 본 적이 있다. 자리물회가 큰 그릇에 함께 나오고 각자 떠먹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제주사람들이 굳이 필자를 위해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생선국을 시킬 때는 자기네 것에 제피를 넣어달라고 주문하는 걸 보았다.

그래서 맛이 어떤지 한 숟가락 떠먹어 봤다. 향채를 맛본다는 사실에 신경이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상태로 그 맛을 보니 역시 제피를 넣지 않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느낌만 그랬을 수도 있다. 향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살짝 고수처럼 향수 같기도, 비누향 같기도 한 맛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식사 전 비누로 손을 씻어서 그런 것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제피가 국물에 우러날 때 함께 들어간 청양고추 같은 다른 양념들과 뒤섞여 제피의 원래 맛이 어떤지 그 미세한 차이를 쉽게 알아차리긴 쉽지 않다.

초피(제피)잎

하지만 제피는 원래 생선의 비린내와 잡내를 잡는데 그만한 게 없다는 것이 제주 사람들의 일관된 이야기다. 원래 제피는 지리산 제피를 최고로 친다. 그 인근의 민물고기 매운탕에는 제피를 꼭 넣는다. 

지리산 제피가 유명하다고는 하나 육지에선 별식(別食)에 제피가 들어가는 반면 제주는 일상적으로 먹는 생선국이나 물회에 제피를 활용한다. 된장 풀고 제피 넣고 식초 뿌리면 그냥 뚝딱 물회 한그릇이 만들어진다. 제피가 원래 우리나라 음식에 자주 들어가는 일상적인 식재료였으나 고추가 도입된 후로는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아 거꾸로 낯선 식재료가 된지 오래다. 그런데 제주에선 아직까지 제피를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식문화가 남아있다는게 독특하다.

제주에서는 제피를 나물이나 장아찌로 활용하기도 한다. ‘제피썹지’라고 부르는 초피잎장아찌는 끓인 간장을 식혀서 제피잎에만 부어놓으면 된다. 초피열매 장아찌는 ‘제피지’라고 부르는데 초피열매를 소금에 버무려 하루쯤 놓아두었다가 제피썹지와 비슷한 과정을 두세번 반복하면 된다. 제피는 음식의 부패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식욕을 돋우는 역할도 해서 은근히 밥반찬으로 밥상에 많이 올랐다.

제피지와 제피썹지(출처_제추인의 지혜와맛)<br>
제피지와 제피썹지(출처_제추인의 지혜와맛)

제피의 맛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제피가루를 김치 담글 때 함께 넣는다. 고추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원래 제피로 김치를 담갔으니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제피가루가 채소의 풋냄새를 없애주는 기능도 있어 김치의 풍미를 더하는데 그만이다. 제피는 고추 이전에 고추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후추역할도 했기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향신료였다. 후추 같은 향료를 너무 귀하게 여긴 나머지 전쟁까지도 불사했던 서양에서는 커피에 제피가루를 넣어 마시기도 한다니 제피가 과연 어디까지 활용 가능한 건지 그 가능성이 무궁 무진해보인다.

‘동의보감에는 (중략) 맵고, 독이 있으며, 속을 따뜻하게 하며 피부에 죽은 살, 한습비로 아픈 것을 낫게 한다. 또한 한랭기운을 없애며 귀주, 고독(蠱毒)을 낫게 하며, 벌레독이나 생선독을 없애며 치통을 멈추고 성기능을 높이며 음낭에서 땀나는 것을 멈춘다. 허리와 무릎을 덥게 하며 오줌횟수를 줄이고 기를 내려가게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같이 초피는 한방에서 해독, 구충, 진동, 건위 약으로 많이 쓰이고, 음식의 향신료로도 많이 쓰여지며 추어탕 등의 비린내 제거와 식중독을 예방하기 위해 많이 사용된다. 초피는 고추처럼 맛이 맵고 성질이 따뜻하며, 독성이 조금 있는 나무이다.’(홍석형 기자, 제주 향토자원에 담긴 이야기 Ⅳ.제주도민일보 2019.08.28.)

우리 음식을 외국인에게 소개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면 이젠 우리 음식이 전 세계적으로 꽤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전엔 코를 잡고 맵다며 호들갑이었던 김치도 이젠 아무렇지 않게 즐겨먹는 서양인의 모습이 흔하다. 사실 매운맛이 우리 전통맛이라 할 순 없다. 우리의 전통의 맛은 그리 자극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맛. 새로운 향료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제대로 된 옛 맛을 보여줄 때가 됐다. 그래서 어쩌면 제피에 그 해답이 있진 않을까 자꾸자꾸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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