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양희의 수다 in Jeju]-제주 나물이야기_놈삐
[류양희의 수다 in Jeju]-제주 나물이야기_놈삐
  • 제주=류양희 통신원
  • 승인 2020.09.1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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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산 무의 방언...무 뜻 한자어 노복(蘆菔)·나복(蘿蔔) 유래 추정
달달한 맛 때문에 생선 넣은 국물요리·조림 등과 천생궁합
월동무로 만든 놈삐나물은 '冬蔘'으로 불릴 정도로 건강에 좋아
제주농기원, 과잉생산 방지용 '단지무' 보급 무청시래기로 승부

대안학교 교사를 하면서 내리 8년 동안 아이들과 텃밭농사를 지어 본 적이 있다. 전업농민들 앞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이론으로도 열심히 공부하고 실제로도 정성껏 농사를 지었다. 교사 생활 마지막은 특히 고양도시농업네트워크에 속한 밭을 빌려 이런저런 경험도 가질 수 있었다.

갑작스레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마지막 농사지은 걸 수확도 못한 채 왔는데 그게 안타까웠는지 밭을 관리하시는 운영위원이 전화를 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제주도에 노는 밭이 한 3000평쯤 있는데 농사를 지어볼 생각은 없느냐는 제안도 해주셨다.

제주에 온 지 채 한 달도 안 되었을 때라 그 제안이 아주 잠깐 솔깃하였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업농을 하기엔 텃밭정도 지어본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북단에서 최남단으로 이주를 한 셈인데 제주의 기후와 토질도 모르고 파종시기도 달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따지고 보면 8년의 텃밭농사 경험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어느 해는 많은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수확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해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는데도 수확이 시원찮았다. 그 까닭을 아마추어 농부는 끝내 알지 못했다.

어느 해는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하지만 여름철 몇 번의 집중 호우와 습기로 심어놓았던 파가 싹 다 죽어버린 일도 있었다. 어느 해에는 더운 여름철 풀을 감당할 수 없어 방치해 놓았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참외를 두 자루나 거둔 적도 있었다. 풀들 속에 방치돼 햇빛을 잘 받지 못한 그 참외가 어떻게 그렇게 단 맛을 낼 수 있었는지, 역시 게으른 농부는 아직도 그 까닭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초보가 농사를 지었다간 망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대안학교 점심 급식비라도 줄여볼 생각으로 학교 김장을 앞두고 배추와 무를 심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배추는 진딧물이나 온갖 벌레들로 구멍이 숭숭 뚫리며 처음부터 기대를 접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어느 정도 자라기 시작하면서 밭 위로 무의 윗부분이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모습이 튼실한 게 깍두기 정도는 충분히 담그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학부모들과 교사들에게 깍두기는 걱정말라고 큰 소리를 쳤다.

무는 그렇게 하루하루 무럭무럭 커갔다. 그만큼 보람도 커갔다. 그리고 드디어 수확 때가 됐다. 모두의 기대 속에 많은 이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가장 튼실해 보이는 무를 하나 힘껏 쑥 뽑았다. 그런데... 엥? 무가 눈에 보이는 그 부분이 다였다. 무가 납작하니 윗부분만 커보였지 아래로 자라지를 않아 납작하고 기이하게 커버린 것이다. 무도 북주기라고 흙으로 두둑하니 계속 덮어주어야 쑥쑥 자라는 것인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밭도 깊이 갈았어야 했는데 오직 삽으로만 갈다보니 나중엔 힘에 부쳐 대충대충 밭을 갈았더니 더 그랬던 것이었다. 한 두 개가 그런게 아니라 거의 모든 무가 다 그랬다. 그해 그 무로 인해 받았던 충격과 깨달음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제주 재래무인 단지무(출처_제주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전국 각지에서 흔히 재배하는 무이지만 특히 제주에서는 무 농사를 더 많이 짓는다. 제주는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별로 없기에 월동 채소의 주산지다. 그래서 제주의 무농사는 특히 겨울철 월동무가 전국적인 필요를 상당수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2018년 전국 무 재배면적은 2만3406ha, 생산량은 123만5000톤이었다. 이 중 제주도가 7746ha로 전국 생산량의 33%를 차지했다. 2등인 강원도가 15%의 생산량을 보이고 있으니 2등의 2배가 넘는 양이다.

그런데 통상적인 가을 배추와 가을 무는 제주에선 많이 재배하지 않는다. 수지도 안 맞고 가을장마나 태풍 등의 영향으로 잘 재배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의 월동무 만으로도 이 정도의 생산량을 보이는 것이다.

제주에선 이렇게 겨울철 배추와 무가 나오기에 육지만큼 김장이 집안의 큰 행사도 아니었다. 김장을 해도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기에 오래 보관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겨울철 그 많은 무를 갖고 무엇을 했을까?

제주에선 무를 ‘놈삐’라고 부른다. 어원을 찾아가다보면 ‘놈삐’라는 말은 ‘노삐’에서 왔고 이것은 무를 뜻하는 한자인 노복(蘆菔), 나복(蘿蔔)에서 왔을 것이란 추정을 하고 있다.

우선 무는 국물요리와 궁합이 맞다. 무를 우려내면 단 맛이 나는 까닭에 ‘놈삐국’이 있었는데 지금도 소고기무국은 즐겨먹는 형태이긴 하나 예전에는 흔히 먹을 수는 없었던 소고기이니 제주에선 여기다가 생선을 넣는 것이다. 물론 생선조림에도 무는 필수적이다. 

국물요리나 조림 외에도 ‘놈삐나물’이 있었다. 놈삐나물이라고 하면 육지에서도 가끔씩 먹는 ‘무나물’이겠으나 제주에서는 월동무가 많은 까닭으로 놈삐나물을 주로 겨울에 먹는 다는 것이 좀 다르겠다. 원래 무를 두고서 동삼(冬蔘)이라고도 했다. 뜻풀이를 하면 겨울에 먹는 산삼이라는 것인데 겨울 감기를 비롯해 겨울철에 먹으면 특히 더 좋다는 뜻이겠다.

놈삐나물(출처_제주인의지혜와맛)

늦은밤 군것질하고 싶은데 먹을 건 없고 부엌에서 식재료로 쓰다 남은 무를 부엌칼로 숭덩 잘라서 우적우적 씹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생 무를 씹어먹고 트림을 안하면 산삼보다 몸에 더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실제로 생 무를 많이 먹으면 건강에 좋지는 않다-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만 여겼는데 지금 와서보니 트림과는 상관이 없더라도 무가 그만큼 좋다는 데서는 아주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트림을 안하려했지만 그럴수록 더 지독한 트림이 나와 늘 낭패감을 느꼈던 그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육지에서는 겨울철에 동치미 정도로 무를 먹을 수 있다면 제주에선 겨울에 흔히 구할 수 있어 각종 요리에 들어가니 무의 영양을 고스란히 섭취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동삼’을 맛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제주에선 무로 떡을 만들어 먹기까지 했다. 제주 대표적인 토속 음식인 ‘빙떡’이 그것이다. 빙떡은 다음에 또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자세한 설명은 미루겠으나 전병에 놈삐나물을 넣었다고 보면 딱 맞겠다.

이렇게 저렇게 무를 활용하고 심심할 땐 그냥 깎아서도 먹다가 그래도 남으면 그것을 썰어 말렸다. 그럼 또 무말랭이가 되는데 그것을 제주에선 ‘놈삐지’라고 불렀다. 그러고보니 제주에서 ‘놈삐지’는 참 많이 먹었다. 육지에서도 흔한 밑반찬이긴 하지만 과거에 비해 요즘엔 많이 찾지 않는 편이지만 제주의 식당들에선 아직까지 웬만하면 빼놓지 않는 반찬이다. 하도 자주 먹어 어금니가 욱신거릴 정도로 자주 먹게 된다.

놈삐지(출처_제주인의지혜와맛)

제주에서 ‘놈삐’는 이렇게 저렇게 많이 활용되었고 그만큼 많이 재배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그만 요즘 탈이다. 월동무가 과잉 생산되는 것이다. 많은 무가 갈아엎어지고 어떻게 하면 무 생산을 줄일까 모두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12년부터는 재배면적 신고제까지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 많은 제주의 월동무가 생산단계에서부터 시장에서 격리되고 있다. 농산물의 척박한 생산 현실과 유통 현실이다.

제주 재래무인 단지무(출처_제주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이래서야 누가 농사를 맘 놓고 지을 수 있을까? 많은 농민이 좌절을 겪지만 그래도 많은 농민이 제주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여전히 무농사를 많이 짓는다. 무가 많아서 문제가 되면 ‘무청’으로 승부를 보는 거다. 제주엔 무가 많으니 당연히 무청 시래기도 많다. 무청을 무치는 것은 물론 무청 시래기 된장국 같은 것으로도 자주 활용해왔다. 아예 올해엔 제주 월동무 생산량을 줄이기 위해 무청 생산용 제주 재래무를 제주도농업기술원 차원에서 농가에 보급하고 나섰다. 제주 재래무는 단지무라고 해서 무는 아주 작은데 비해 무청이 풍성한 게 특징이다.

제주 시래기 된장국(출처_제주아방 업체홍보사진)
제주 무청 시래기(출처_제주아방 업체홍보사진)

제주 농민들은 이런 황소 고집같은 우직함으로 칠전팔기(七顚八起)를 지속해왔다. 아무래도 이러한 힘은 ‘동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자꾸자꾸 ‘놈삐’를 떠올려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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