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시 비축·농지 보전부터 위기 시 증산·배분까지…법적 근거·기금·모의훈련 필요
국제 곡물가격 급등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식량안보를 지키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왔다.
수출 제한과 공급망 차질로 필요한 물량 자체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 국내 생산·비축·수입·배분을 연결하는 국가 차원의 위기 대응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제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은 ‘식량안보 위기 시나리오와 대응 체계 구축(2/2차년도)’ 보고서에서 식량 공급 부족의 지속 기간과 국민에게 필요한 열량을 기준으로 위기 단계를 설정하고, 단계별 대응 수단과 부처별 역할을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승준호·최윤영·이동소·박도연 연구진이 수행한 이 보고서는 2025년 12월 발간됐다. 연구진은 국내외 정책과 제도를 검토하고, 주요 곡물 수입이 중단되는 상황을 가정한 모형 분석을 통해 식량 공급 전략과 대응체계 운영 방안을 제시했다.

가격 경보만으로 부족…‘물량 조달 실패’ 대비해야
보고서는 기상이변과 국제 분쟁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수출 제한을 중심으로 식량보호주의가 확산하면서, 수입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공급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 운영 중인 국제 곡물 조기경보시스템과 위기 대응 매뉴얼은 가격 급등 등에 대응하는 기반이지만, 물량 조달에 실패할 가능성까지 포함한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이 강조한 방향은 조기경보를 실제 행동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위험을 감지한 뒤 구매·비축·생산 조정 등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시행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과 집행 체계를 함께 갖춰야 한다는 설명이다.
해외 사례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확인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2025년 4월 시행한 ‘식량공급곤란사태대책법’을 통해 공급 곤란 징후부터 심각한 식량 부족까지 단계별 대응 기반을 마련했다. 유럽은 식량안보 위기 대응메커니즘을 통해 공급망 참여 주체 간 협력과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 전달을 강화하고 있다.
공급량 20% 감소·하루 1,850㎉ 미만…위기 판단 기준 제안
연구진은 식량 위기 대응 단계를 평시인 0단계부터 가장 심각한 3단계까지 구분했다. 공급 부족의 지속 기간에 더해 공급량 감소와 열량 부족을 정량적으로 판단하자는 제안이다.
2단계 위기는 해당 품목의 공급량이 평년 대비 20% 이상 감소하는 경우, 3단계는 1인당 하루 공급 열량이 1,850㎉를 밑도는 경우를 판단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는 보고서가 제안한 기준으로, 현행 국가 위기 발령 기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평시에는 국내 생산기반과 공급망을 유지·강화하고, 1~2단계에서는 출하·판매 조정, 수입 촉진, 국내 생산 확대를 추진하도록 했다.
가장 심각한 3단계에서는 공급 열량을 고려한 증산과 한정된 식량의 공정한 배분, 가격 안정 대책이 필요하다고 봤다.
운영 조직도 위기의 심각도에 따라 구분해 1~2단계에는 ‘식량 위기 대응위원회’, 3단계에는 ‘식량 위기 대응본부’를 설치하고 농림축산식품부를 중심으로 경제·외교·수산·식품안전 분야 관계부처의 역할을 명확히 정립할 것을 제안했다.

밀·콩·옥수수 수입 중단 가정…보리·콩과 농지의 전략적 가치 부각
보고서는 주요 품목의 수입 제한으로 물량 부족이 최소 1년간 지속돼 이듬해 최소 필요 열량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가정하고, 조달비용을 최소화하는 식량 공급 모형을 분석했다.
분석 대상은 곡물, 유지류, 두류, 서류, 설탕류다. 품목별 수입 제한과 최소 필요 열량, 국내 재배면적 감소 등을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그 결과, 모형의 기준인 칼로리 자급률 29.4% 이상을 유지하도록 조건을 부여했을 때 겨울철 논에서 재배하는 보리와 밭작물인 콩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게 나타났다.
밀·콩·옥수수를 동시에 수입할 수 없는 시나리오에서는 설정한 필요 열량을 전부 공급하는 조건 아래 칼로리 자급률을 최대 86%까지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이는 작물 생산과 조달을 조정한 모형 결과로, 현재 생산체계에서 곧바로 달성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입이 제한되지 않은 다른 품목을 자유롭게 들여올 수 있다고 가정하면 현행 재배면적으로도 필요한 열량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구진은 3대 곡물 수입이 막히는 상황에서는 다른 작물의 수입도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위기 시 국내 생산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열량을 최대한 확보하려면 현재의 경지면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축·재원·법률·훈련…평시에 준비해야 위기 때 작동
연구진은 위기 대응체계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법적 근거와 재원, 평시 준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식량안보 독립법을 제정할 경우 국민의 식량 접근권과 국가의 책무를 반영하고, 농지·수리시설 보전, 종자산업 육성, 효율적인 비축제도 운영 등을 핵심 내용으로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위기 대응본부 설치와 단계별 공급 확보를 위한 협력 요청·지시의 근거도 필요하다고 봤다.




전문가 조사에서는 국내 식량 비축시설과 비축량 확대가 중요도와 효율성 측면에서 높게 평가됐다. 이에 해외 수급 위험과 가격 변동, 국내 물가 영향을 고려해 비축 확대 품목과 물량을 정하고, 민간의 비축 역량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긴급 대응 재원으로는 중앙정부·지방자치단체·민간업계 등이 참여하는 ‘식량 위기 대응 기금’ 조성을 검토하도록 했다. 기금은 비축·방출과 수입 조정을 통한 시장 안정, 긴급 수급 조치, 증산과 생산기반 복구, 관련 연구 등에 활용하는 방안이다.
아울러 수입 중단과 공급망 차질을 구체적으로 가정한 모의훈련을 실시해 기관·기업·생산자의 역할을 점검하고, 훈련에서 드러난 문제를 법률과 지침에 반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식량안보 대응의 실효성은 위기 발생 이후의 조치뿐 아니라 평시에 생산기반과 비축, 협력체계를 얼마나 준비했는지에 달려 있다는 진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