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창간5주년기획-슬로푸드를 논하다] ② 소멸 위기 음식문화와 생물다양성 보존하는 ‘프레시디아’와 'DOP'
[FI창간5주년기획-슬로푸드를 논하다] ② 소멸 위기 음식문화와 생물다양성 보존하는 ‘프레시디아’와 'DOP'
  • 이탈리아 토리노 연착=김현옥 기자
  • 승인 2022.11.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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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동식물 종자부터 식재료·가공식품 등 발굴 등재한 ‘맛의방주’ 두레
수 세대 전해진 복잡미묘한 전통 기술과 종자 생산자 육성 프로젝트
국제슬로푸드협회는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토종 종자를 비롯한 농산물, 식재료 등을 발굴 보존하기 위해 '맛의방주'와 '프레시디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국제슬로푸드협회는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토종 종자를 비롯한 농산물, 식재료 등을 발굴 보존하기 위해 '맛의방주'와 '프레시디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탈리아 토리노 파르코도라에서 5일간 열린 ‘테라마드레 2022’ 행사 중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프레시디아(presidia)'다. 그만큼 프레시디아는 슬로푸드 운동의 핵심어라 할 수 있다.

방어하다, 보호하다, 지킨다는 의미의 프레시디아는 가만 놔두면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다양한 토종 씨앗과 농축수산물 및 그것을 이용해 만든 질 좋은 식품과 음식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슬로푸드 프로젝트 중 하나다. 프레시디아는 그 지방 고유의 종들을 지키는 한편 지역특색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은 물론 음식을 통해 정체성과 역사를 보존하는 일에 힘쓴다.

프레시디아는 또 전통적인 기술, 즉 고기잡이나 가축기르기, 가공 또는 재배방법 외에도 오래된 올리브 농장이나 감귤 농장 등 자칫 없어질 수 있는 농촌과 생태계를 지속가능하게 보호하는 조치여서 그 의미와 가치가 매우 크다.

주로 대를 잇는 가족농이나 의식이 깨어 있는 소규모 생산자들이 주축이 되는 프레시디아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거대 시장에 맞서기 어렵기 때문에 5인 이상의 독립농가나 전통식품 생산자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힘을 모으는 방식인데, 슬로푸드 본부가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정하면 슬로푸드생물다양성재단이 기술적, 재정적 지원 등 이모저모로 도와주고 있다. 

프레시디아는 화학적 생산방식 금지, 동물복지 실현, 지역생산품 사용을 통한 종자 보호 외에도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친환경 포장 등의 기본적인 원칙을 지켜야 하므로 구조적으로 대량생산을 통한 수익성을 높이기 어렵다. 이러한 프레시디아에 슬로푸드 재단은 품질의 향상을 위한 기술적 도움은 물론 국내외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도록 판로를 열어주기도 한다.

▶ 프레시디아는 '맛의방주' 등록 품목의 생산자 집단

프레시디아는 대대손손 가업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에 장인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기 위한 강한 의지로서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등재시켜야만 한다. 한마디로 프레시디아는 맛의방주에 등재된 품목의 생산자 집단으로서, 맛의방주 두레인 셈이다.

‘맛의방주’는 성경 속 노아의 방주처럼 지구상에서 소멸 위험에 있는 토종 동식물 종자는 물론 식재료, 전통의 맛, 가공식품 등을 발굴해 목록을 만들어 지역의 음식문화 유산을 지켜나가는 운동이다.

슬로푸드 국제총회는 수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복잡 미묘한 기술과 종자는 농부와 장인이 쌓아온 지식의 산물로서,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중요한 요인임을 재확인하고 2012년 10월, 맛의 방주를 미래 슬로푸드 식문화로 확산시키는 것을 핵심 정책으로 결정했다.

맛의 방주에 등재되는 품목은 그 목적에 맞게 선정기준도 매우 까다롭다. 우선 △특징적인 맛이 있어야 하고 △특정 집단의 기억 및 정체성과 연결돼야 하며 △오랜 세월동안 존재했던 다양한 종과 환경친화적인 동식물이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식품의 주원료가 특정지역에서 생산 또는 조달된 것이어야 하고 △부재료는 다른 지역산일지라도 전통방식으로 생산돼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생산물이 그 지역의 환경·사회·경제·역사적으로 연결돼야 하고 △농민이나 소규모 가공업체에 의해 제한된 양으로 생산돼야 하며 △현재 또는 미래에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어야 한다.

슬로푸드는 사라질 위기에 있는 각국의 토종 씨앗들을 발굴해 '맛의 방주'에 등재시키고, 이를 지키는 생산자 집단을 '프레시디아'로 선정함으로써 생물다양성을 지키려는 힘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슬로푸드는 사라질 위기에 있는 각국의 토종 씨앗들을 발굴해 '맛의 방주'에 등재시키고, 이를 지키는 생산자 집단을 '프레시디아'로 선정함으로써 생물다양성을 지키려는 힘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8월 현재 150개국 5500여종 맛의방주 등재... 한국은 1호 '제주푸른콩장' 등 110종 

2022년 8월 현재 전세계 150개국에서 5,500여종이, 우리나라에서는 ‘제주푸른콩장’을 선두로 110종이 국제슬로푸드 '맛의 방주'에 등재됐다.

전 세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씨앗들을 발굴해 보존 번식시키기 위해 등재된 '맛의방주'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우리나라 제주푸른콩장.
전 세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씨앗들을 발굴해 보존 번식시키기 위해 등재된 '맛의방주'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우리나라 제주푸른콩장.

한국슬로푸드협회 김종덕 회장은 “맛의방주는 멸종위기에 놓인 품목을 알려 사회적 관심을 모으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이것들을 일부러 찾아서 소비하고 이야기함으로써 더 많이 동참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생산자를 후원하는 것이 기본 취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푸른콩장, 홍감자, 제주흑우, 갯방풍 등 100여종이 맛의방주에 등록됐고, 4개의 프레시디아가 있지만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생산자 협업은 협회가 풀어나가야할 숙제다”고 말했다.

오랜 길드(guild, 동업자조합) 문화로 협력하는 것에 익숙한 유럽에서도 이탈리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레시디아를 자랑하며, 따라서 맛의 방주에 등록한 품목도 최고 수준이다. ‘테라마드레 2022’ 전시장에 선보인 프레시디아는 그 제품이 품고 있는 의미와 가치만큼이나 남다른 감동으로 전해왔다.

▶ 과일에선 보기 드문 DOP(원산지명칭보호) 인증 사과도 선봬

‘테라마드레 2022’ 현장에서 만난 프레시디아의 독특성과 품질 수준은 DOP(Denominazione di Origine Protetta, 원산지 명칭 보호) 인증을 받은 사과로 대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일에서 DOP를 받는 일은 매우 드문데, 프레시디아의 일반적인 개념를 뛰어넘는 DOP 인증 사과(멜린다)가 선보여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과일에서 DOP(원산지명칭보호)를 받는 일은 매우 드문데, '테라마드레2022' 전시장에서는 프레시디아의 일반적인 개념를 뛰어넘는 DOP 인증 사과(멜린다)와 이를 원료로한 잼 제품이 선보여 큰 관심을 모았다.
과일에서는 드문 DOP(원산지명칭보호) 인증을 받은 에트나 사과

이탈리아는 EU가 통합되기 이전부터 자체적으로 DOP에 준하는 인증제도를 시행해 왔기 때문에 DOP가 갖는 가치, 다시말해 이탈리아의 지역성이 엄청나게 강할 수밖에 없다. 기존 이탈리아의 품질등급은 DOC(Controlled Designation of Origin), DOCG(Controlled and Guaranteed Designation of Origin), IGT(Indicazione Geografica Tipica, 전통적 지리적 표시), IGP(Protected Geographica Indication 지리적 보호 표시)로 운영됐으나 지금은 EU가 인정하는 DOP와 IGP로 통합됐다.

"이탈리아는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물고기에도 IGP를 인증해 주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특별하고 좋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이탈리아에서 12년째 목회 활동을 하면서 이번 테라마드레 통역을 담당한 정상신 목사는 강조했다..

이곳 에밀리아로마냐에서 생산된 DOP와 IGP 제품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3대째 가업을 이어 산양유와 이를 원료로 한 치즈, 발효유 등을 생산한다는 'CASCINE DEL GUSTO(맛있는농장)' 대표는 자신의 일에 대한 소감을 묻자 온얼굴에 환한 미소를 가득 담아 “매우 만족스럽고 자부심을 느낀다. 자연의 하늘과 함께 일하면서 각종 제품을 통해 전 세계인과 어우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고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진심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순간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이 덩달아 푸근해진다. 이러한 순수성이 바로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이유일 것이다. 

3대째 가업을 이어 산양유를 원료로 치즈, 발효유 등을 생산하는 '맛있는농장' 대표 농부는 자신의 일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며 행복한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손님을 맞아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전시 부스에서는 '맛있는농장'에서 만든 제품으로 구성한 한끼 식사를 한 접시에 7~8유로에 판매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전통 파스타기업인 디마르티노(DI MARTINO) 제과점은 역시 이탈리아 대표 커피기업인 라바짜(LAVAZZA) 커피와 잘 어울리는 맛의 빵, 과자 등과 함께 아침 식사를 제공했다. 디마르티노와 라바짜는 슬로푸드 후원사로서 이번 ‘테라마드레 2022’의 여러 행사들을 도왔다.

이 대목에선 우리나라도 대기업들이 전통 공생농법으로 자연을 살리려는 소규모 농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지원해주며 상생하는 노력을 더 많이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최대 커피메이커이자 슬로푸드 후원사인 '라바짜' 푸드트럭 앞엔 오픈하자마자부터 폐점시간까지 커피를 마시려는 소비자들의 줄이 끊이지 않는다.
100년 전통의 파스타기업 디마르티노가 운영하는 제과점. 라바짜 커피와 잘 어울리는 '오래된 전통의 맛'을 자랑하는 빵과 과자류로 관람객들의 아침식사를 제공했다. '맛은 이곳에서 탄생했다(IL SAPORE E NATO QUI)'는 광고 문구가 인상적이다.

시칠리아에서는 다양한 과일들이 생산되는데, 아그리젠토산 오렌지(아란치아)가 특히 유명하다. 시칠리아에는 튜브 모양의 빵을 튀겨서 도우로 사용하고 그 속에 채소나 과일, 쌀, 푹 익히 양념고기 등을 넣어 다양한 맛을 내는 카놀리(CANNOLI)라는 후식이 있는데, 이제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어느 곳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다. 후식이지만 이것 하나만 먹어도 식사가 될만큼 양이나 영양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파르미자노 레지아노 치즈(Parmigiano-Reggiano Cheese)와 쌍벽을 이루는  그라나 파다노 치즈(Grana Padano Cheese)를 직접 맛보는 기회도 가졌다. ‘알갱이가 있다’라는 뜻의 ‘그라나(Grana)’와 치즈가 처음 만들어졌던 ‘포(Pô)’강을 지칭하는 라틴어 ‘파두스(Padus)’를 합쳐 명명한 그라나 파다노 치즈는 1100년경 밀라노 근처 키아라발레(Chiaravalle) 수도원에서 시토회의 수도승들이 남는 우유를 가지고 만들기 시작한데서 비롯됐다.

그라나 파다노 치즈는 다른 하드치즈에 비해 지방 함량이 낮은 것이 특징으로, 이는 전날 저녁에 짠 우유를 밤새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 상층부에 형성된 크림을 걷어 내고 만들기 때문이다. 그라나 파다노 치즈는 에밀리아로마냐, 롬바르디아, 베네토, 피에몬테 등 4개 주에서만 전통적인 방법으로 생산이 가능한 원산지 명칭보호(DOP)를 받는 제품이다.

주산지인 시칠리아 오렌지 등을 이용한 디저트 카놀리(CANNOLI)와 그라나 파다노 치즈 제품들이 DOP(원산지명칭 보호) 인증 고품질을 뽐내고 있다.
채소, 과일, 쌀, 고기 등으로 속을 채운 여러가지 종류의 시칠리아 디저트 '카놀리'(위)와 친환경 젖소 목장과 뛰어난 사육기술로 고품질 우유를 생산해 만든 다양한 그라나 파다노 치즈제품들.
'이곳에서 시칠리아 오렌지의 오리지널 맛을 볼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는 시칠리아 카놀리 부스

올리브 나무는 햇볕을 좋아해서 농부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철저하게 떼어 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올리브유는 빛을 완전히 가려야만 최상의 맛과 신선함을 오랫동안 유지한다. 올리브는 보통 9월과 10월에 흔들어서 떨구는 방식으로 수확하며, 통상 6개월까지 좋은 품질 상태를 갖는다.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질때까지 어떤 것도 햇빛을 가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올리브 나무다. 오랜 세대를 지나도 올리브 나무 생명력이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올리브 열매를 수확해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그대로 압착해서 추출한 '엑스트라베르지네 올리브오일'.의 신선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햇빛으로부터 보호하는 검정색 병포장이나 캔 포장 등이 적합하다. 

올리브를 따서 열을 가하지 않고 추출한 최고급 생기름을 엑스트라 베르지네(Extra Vergine)라고 한다. 상온에서 어떠한 무리를 주지 않고 짜기 때문에 농부 입장에서는 수율이 적어 손해일 수 있지만 최고 품질 대우로 보상이 이뤄진다.

많은 올리브유 병색깔이 까만 이유는 올리브유 품질을 보존하기 위한 것으로서, 관련업계에서는 정석으로 통하며 캔에 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올리브 열매는 기름짜는 것 외에도 다른 식품의 원료로, 또는 그 자체로 양념해서 먹을 수 있으며, 올리브 나무는 가구를 만드는 목재로 쓰이는 등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손꼽힌다. 

흡사와 모과와 같은 대형 양파인 치폴라는 잼으로 만들어 빵에 곁들여 먹을 수 있다.

흡사와 모과와 같은 대형 양파인 치폴라는 잼으로 만들어 빵에 곁들여 먹을 수 있다. 하나의 크기가 2kg까지 달하며, 다른 양파보다 달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은 음식의 중심에 이 있지만, 이탈리아는 콩이 올리브, 포도, 밀, 빵, 치즈, 우유 등에 밀린다. 이러한 콩을 다시 살려보겠다는 연대 운동이 이탈리아 루카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2019년 제주 6차산업 국제포럼에서 콩 생산농가들이 소외감을 극복하고 콩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연대하도록 앞장섰던 루카의 한 농부가 슬로빈(Slow Bean)을 주창하며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을 테라마드레2022 전시장에서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콩은 어림잡아 50여종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콩이 올리브, 포도, 밀, 치즈, 우유 등에 밀려 소외감을 느낀 이탈리아 콩생산자들이 루카 지역을 중심으로 콩의 우수성을 알리는 슬로빈(Slow Bean) 운동을 촉발시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2019년 제주 6차산업 국제포럼에 참석해 슬로빈(Slow Bean) 캠페인의 배경과 철학을 발표해 공감대를 이끌어낸 슬로빈 주창자 마르코 델 피스토이아 농부가 자신이 지키고 있는 붉은콩(팥)을 홍보했다. 그는 부스 뒷면에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슬로빈 운동가들이 자기 나라의 토종콩을 얼굴에 붙인 사진들을 전시해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콩은 어림잡아 50여종으로 추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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