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양희의 좌충우돌 제주정착기-수다 in Jeju]살 집 찾아 삼만리(3)
[류양희의 좌충우돌 제주정착기-수다 in Jeju]살 집 찾아 삼만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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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1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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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처음 소개받은 집은 ‘가시리’라는 마을의 귤 밭 사이 외딴집이었다. 일단 시골살이를 염두에 뒀다면 이 집은 귀촌하기 안성맞춤이다. 28평, 방 3개에 단독주택 단층집인데 年稅 350만원이라는 매우 저렴한 조건이었다. 뒤늦게 알게됐지만, 가시리라는 마을 자체도 꽤나 유명한 곳이다.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무조건 이 집을 선택했을 것이다.

가시리(加時里)는 표선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넓이로 널따란 초원에 목초가 풍부해 예로부터 말을 많이 기르던 마을이다. 특히 조선 정조 이후 100여년간 갑마장이 있었던 곳으로 갑마(甲馬)란 조선시대 최고 등급의 말을 이르는 것이니, 여기서 자란 말들이 어승마(御乘馬)-왕이 타는 말-로 보내졌다. 한때 민가가 360여 채가 있어 제주에선 작지 않은 마을이었으나 4.3사건으로 마을 전체가 소개되면서 맥이 끊기게 됐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도 오지 중 오지로 인적이 드물었던, 사실상 버려진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어렵사리 겨우겨우 마을이 명맥을 이어가다가 오늘날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2010년대 초반부터였다. 대기업의 풍력발전단지를 유치하면서 전기 생산으로 인한 수익의 일부를 마을 발전을 위해 쓰기시작하면서 급격한 변화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통 기피시설이 들어오는 대가로 지역발전기금을 받는데, 그것이 주민의 피부로 와닿는 방향으로 집행되는 경우를 별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가시리는 달랐다. 주민들이 직접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여러 사업들을 많이 추진했고, 그 중에서도 신문화공간 조성사업은 당시 시골마을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마을에서는 우선 문화센터를 짓고 마을주민을 대상으로 여러 동아리를 운영하는 한편, 이 과정 앞뒤로 자연스럽게 접촉한 예술인들을 마을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거주 공간을 마련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제주 이주 붐은, 이주민들에게 긍정적인 마을 분위기를 바탕으로 대안적 삶의 공간을 찾던 도시인들마저 마을로 빨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이 마을 속속들이는 다 알지 못하지만, 대개 여러 사업들을 추진하고 외지인들이 늘어나다보면 갈등도 많아지고 곳곳에서 잡음이 많아질만도 하다. -도시에서 공동체나 마을만들기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보아온 터라 대충 짐작이 된다.- 헌데, 아직까지 가시리의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어떤 큰 갈등의 모습이나 파열음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 마을에서 주관하는 큰 행사들에 가보니 서로가 상생하며 벌인 소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여러 사업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가끔 점심식사를 하러 가시리에 가보지만 가시리사무소를 중심으로 그 인근주변엔 늘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그곳이 상가 밀집 지역은 결코 아니다. 상가라고 해봤자 동네가게나 식당 몇 곳, 그리고 마을에 정착한 예술인들이 공방같이 차려놓은 소점포에 핸드메이드 작품들을 놓고 파는 곳이 전부다. 가시리는 현재 500여가구 1000여명이 살아 전례 없이 가장 많은 사람이 살게됐지만 여전히 넓은 구역에 비한다면 인구밀집도가 높지 않고 집들이 다들 띄엄띄엄 있어 번화가의 모습보다는 깡촌(?)에 더 가깝다. 그런데 그런 마을에 늘 가보면 생기가 느껴지는 거다.

이러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가시리에는 연중 축제도 많고 예술가들의 공연이나 전시회 같은 것도 자주 연다. 특히 가시리 유채꽃 축제는 마을의 온 에너지가 집중된다. 봄에 가시리의 녹산로변에는 머리 위로는 벚꽃이, 머리 옆으로는 유채꽃이 한 10km가량 쭉 펼쳐진다. -이 풍경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꼽힐만큼 장관이다.

◇ 가시리에는 유채꽃밭 면적만 10만 평방미터에다가 행사장 면적이 74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유채꽃을 정말 원없이 볼 수 있다..

보통 제주 유채꽃을 보러 성산일출봉 부근을 많이 간다. 워낙 달력 사진으로 많이 나온 곳이니 그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일출봉 근처의 유채꽃밭은 생각보다 그리 넓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리고 대개는 천원, 이천원 씩 입장료를 별도로 받는다.

하지만 가시리에는 유채꽃밭 면적만 10만 평방미터에다가 행사장 면적이 74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게다가 도로 양옆의 유채꽃길은 행사기간중에는 차없는 거리로 직접 걸으며 유채꽃을 만끽할 수 있다. 유채꽃을 정말 원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입장료가 별도로 없다. 가을엔 이곳에서 억새 축제를 하는데 제주도는 워낙 억새가 장관인 곳이 많아 굳이 가보진 않았지만 어쨌든 넓디넓은 유채꽃밭에 억새가 펼쳐지니 그 또한 장관이다. 그런데 놀라운건 이러한 기획들을 작은 마을 단위에서 척척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채꽃축제 행사장은 ‘조랑말박물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이 박물관 역시 마을이 세운 ‘리립박물관’이다. 국립, 도립, 시립, 군립까진 들어봤는데 ‘리립’이라니 가시리의 저력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도에 온 지 얼마 안돼 아이들이 말을 타보고 싶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이곳을 와봤다. 경험삼아 말 한번 타보고 싶다면 5000원만 줘도 타볼 수 있는 곳이 제주도 안에 여러 곳이다.

하지만 이 곳에선 드넓은 초원에 시각이 확 트인 제주도 중산간의 풍경을 충분히 눈에 담으며 말을 탈 수 있다. 그러니 가격은 그리 싸지만은 않다. 말을 타는 것도 좋지만 조랑말박물관 옥상에서 조망하는 가시리 일대의 풍경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넓디넓은 푸른 초원에 멀리 또 가까이서 풍력발전기가 여유롭게 돌아가고 그 뒤를 높고 낮은 오름이 배경으로 받쳐준다. 이 풍경... 실화냐? - 실화다!!

◇ 말똥쿠키는 색깔·모양이 실물처럼 생겼다.

조랑말박물관 건물 밖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작은 카페가 있어 차 한잔 여유롭게 마실 수도 있다. 이 곳에서 판매하는 말똥쿠키는 색깔이나 모양이나 실물처럼 생겼지만 경험삼아 먹기엔 수제쿠키로 꽤 맛이 달고 맛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가시리는 ‘육지 것’이 정착하기에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마을이었지만 인연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집주인이 집을 비운채 육지로 장기 출타한 까닭이다. 집주인은 제주사람이었지만 한달에 절반가량은 자녀들이 사는 서울에 머문다 했다. 그러니 집주인을 직접 만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한다는 거였는데 당장 며칠있으면 새로 출근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서둘러 이주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막연하게 기다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중개인을 믿고 그냥 집을 내주는 도시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그 주인은 직접 세입자 면접(?)을 보고 나서야 결정하시겠다는 좀 까다로운 옵션이 붙어있었다. 중개인의 부가 설명에 따르면 그밖에도 까다로운 조건이 몇가지 더 있었다. 앞마당에 잡초가 무성하지 않게 잘 관리할 것과 겨울 귤철에 집과 붙어있는 귤밭에서 다소 시끄러운 작업이 있더라도 이해할 것 등등 얼핏봐도 만만한 집주인은 아니었다.

집주인을 며칠이고 마냥 기다릴수 없는 시간적 촉박함으로 애초부터 계약이 성사될 수 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워낙 놓치기 아까운 미련이 남아 이 집을 포기해야만 하는 몇가지 핑계를 머릿속에 더 만들어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우선 운전을 못하는 아내가 좀 마음에 걸렸다. 아침에 차를 끌고 출근해버리고 나면, 운전 못하는 애엄마와 아이 둘은 꼼짝없이 그 외딴 집에 고립되기 쉬웠다. 버스정류장까지 거리가 있는데다가 시골 버스 배차 간격이 당시만 하더라도 두시간 간격이라니 그걸 이용하기 쉽진 않겠다 싶었다. 게다가 외딴 마을에 식구들을 남겨두고 홀로 출근을 하자니 이중삼중의 보안장치에 익숙한 도시 아파트 생활자 입장에선 이것저것 불안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그 집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여러모로 억지로 될 일은 아니었다. 진취적이라면 역리(逆理)도 마다하지 않아왔다. 하지만 이젠 순리(順理)라는 걸 존중하게 됐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역리로 취할게 아니다. 물 흐르듯 순리라는 것에 몸을 한번 맡겨보기로 했다.

그것이 제주에서의 첫 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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