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양희의 좌충우돌 제주정착기-수다 in Jeju] -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2)
[류양희의 좌충우돌 제주정착기-수다 in Jeju] -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2)
  • 류양희
  • 승인 2018.04.05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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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지 안될지 모를 일에 할지 말지의 구분선은 딱 한걸음이었다. 그건 ‘0’과 ‘1’의 차이에 불과해 보이지만, 곧 ‘무(無)’와 ‘유(有)’의 차이이기도 하다. 달에 첫 발자국 새기고 돌아왔다는-논란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닐 암스트롱은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일 지 모르지만 결국은 위대한 도약의 한 걸음이었다고 말했다.

심하게 덤벙대기만 하던 유년기 시절 늘 듣던 말이 ‘매사에 신중해라’였다. 그래서 도무지 난 매사에 너무 신중하기만 하다. 인생이 익사이팅 스포츠도 아니고 신중함을 나무랄수야 없겠지만 분명 부정적인 면이 있다. 내 머릿속에선 하루에도 수 백번 만리장성을 쌓다가도 허문다. 되돌아보면 이런 신중함을 핑계삼아 정작 일상에서 벗어나기 싫은 무서운 관성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신중한 건 좋은데 매사 우유부단한 ‘햄릿’이 돼버린 건 또 아닐까 갸우뚱도 해본다.

나만큼 신중한 사람들은 주변에 많기도 하다. 대부분 제주에서 살아보는 꿈을 한번씩 꿔봤던 이들인데, 그 연장선에서 내게 어떻게 제주에서 살게됐냐고, 또 어떠냐고 묻는다. 솔직히 내가 굳은 결심과 각오로 준비한 ‘능동태 제주행’이었다면 뭐라도 더 떳떳하고 당당하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도 별 다를바없이 주저주저하다가 그저 상황에 밀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게 없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 그저 살던 자리 주변이나 다른 선택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도 있었겠으나 굳이 제주로 내딛게 된 그 한 발자국의 용기만큼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를 잠깐 생각해봤다.

식품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할 때 ‘프로슈토(Prosciutto)’ ‘모르타델라(Mortadella)’ ‘살루미(Salumi)’ 등 이탈리아 햄의 국내 런칭 행사를 취재한 적이 있다. 지금은 국내 이탈리아 레스토랑 외에도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전에는 없다가 그때 처음 본격 런칭된 것이라 행사 자체가 컸다. 당시 육가공 분야 취재를 담당하고 있어서 그 행사에 가게 됐지만, 국내 햄 소시지 외엔 별로 아는 바가 없는데다가 이런 고급 식재료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 다소 생소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갈 무렵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을 주최 측에서 해왔다. 이탈리아 햄에 대해 기사로 잘 소개한 언론사 기자들을 선별해 이탈리아 농무부 산하 살루미 평가원에서 직접 ‘올해의 기자상’을 수여한다는 것이다. 선발분야는 일간신문 기자 한 명, 영자신문 기자 한 명 그리고 식품전문지 기자 한 명, 모두 세 명이었다.

외국 나갈 기회가 흔치 않은데다가 그것도 경비가 비싸 쉽사리 계획하지 못하는 유럽. 그 중에서도 유럽 문화 근간인 로마시대의 가장 핵심을 볼 수 있는 이탈리아 여행이라니 나의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기자들은 괘념치 않는 분위기였다. 일상이 늘 바쁜 기자들이, 될 지 안될 지도 모를 막연한 일에 적잖은 시간을 투자해 매달리는 것 자체가 귀찮은 까닭이었으리라. 나 역시 일상이라는 관성이 무겁게 발목을 잡는데다가, 기사가 게재되면 그걸 또 영문으로 번역해야 하고, 회사 소개나 자기 소개도 영문으로 준비해야 하는 등 어느정도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어서 계속 주저주저했다.

일을 추진하면서 고비마다 괜한 짓인가 싶어 몇 번을 망설이기도했다. 하지만 당시 데스크인 국장님의 지지와 도움으로 한 고비를 넘기고, 상사맨이어서 영어로 밥먹고 사는 손위 동서의 불철주야 번역으로 또 한 고비 넘기고, 식품전문지에선 지원자가 아무도 없다는 소식에 또 한 고비를 넘겨 결국 며칠을 씨름한 끝에 겨우 서류들을 보내놓았다.

◇ 첫 발자국 떼기가 힘들었지, 그 다음 발걸음은 처음의 그것보단 훨씬 가벼웠다.
난 오늘도 한발자국 한발자국... 그렇게 제주에서 걸음마를 배우는 중이다.

나름 최선을 다해 신청했기에 기대감이 컸으나, 그 해가 다가도록 감감무소식에 실망감이 쌓여갔다. 안됐나보다 포기하려할 즈음, 결국 해가 바뀌고 나서야 대사관으로부터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이탈리아 농무부 산하 살루미평가원이 수여하는 ‘제1회 맛의 리포터상(Reporter del Gusto)’의 수상자가 된 것이다. 뛸듯이 기뻤다.

끝내 식품전문지 기자들 중엔 지원자가 나밖에 없었다. 이런걸 ‘거저 주웠다’고 해야하는데, 그러기엔 지리함 속에서도 꿋꿋이 한발자국 한발자국 준비했던 내 노력이 좀 억울한 면이 있다.

난 열흘가까이 최고의 VIP대우를 받으며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하는 행운을 거머쥐었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다른 기자들은 무척이나 날 부러워했다. 하!하!하!!

그 때 여행 자체도 잊을 수 없지만 삶에 큰 교훈을 얻은 게 하나 있다.

그 것은, 어떠한 주저되는 상황과 맞닥뜨려졌을 때, 그저 망설이고 있기보다는 일단 딱 한발자국만이라도 내딛어보자는 거였다. 안 딛어보는 것보다 일단 한발만이라도 내딛어보면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또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발 내딛었는데 영 아니다 싶으면 수정할 시간은 아직 충분히 있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이 경험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롤러코스터 같은 남편과 산다는 아내도 "사실 딱 그 심정으로 남편따라 제주에 왔다"는 고백이고 보면 부창부수라 아니할 수 없지 않은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묵직한 한 발자국이든, 자의반 타의반 한 발자국이든. 난 내가 바라던 것에 그렇게 한 발 다가갔다. 첫 발자국을 떼기가 힘들었지, 그 다음 발걸음은 처음의 그것보단 훨씬 가벼웠다. 난 오늘도 한발자국 한발자국... 그렇게 제주에서 걸음마를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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