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양희의 수다 in Jeju] 제주 흑우 이야기①
[류양희의 수다 in Jeju] 제주 흑우 이야기①
  • 제주=류양희 통신원
  • 승인 2019.07.0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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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토속 음식 이야기를 하면서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재료로 하는 요리 이야기들을 해봤다. 그렇다면 순서상 소고기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유감스럽게도 길게 쓸 이야기 거리가 없다. 우리나라 육(肉)고기 중에 최고로 치는 소고기인데 왜 쓸게 없을까. 

소는 오랜 농경사회에서 집안의 큰 자산이었다. 쉽게 잡아먹을 수 없는 것이다. 잘 키운 소 한 마리는 제주도 몇 천 평의 땅하고도 안 바꿨다는 옛이야기는 괜한 말이 아니다. 그러니 만일 소를 잡게되면 뼈까지 우려먹을 정도로 각종 식재료로 활용한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소고기가 다양한 대중적 토속요리로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반 민초들 중 그야말로 ‘이밥에 쇠고기국’을 생애 몇 번이나 먹어보았겠나.

예나 지금이나 소고기는 비싸고 귀한 고기다. 수입 소고기가 아니라 우리 한우 말이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값진 고기라는 점에서 대중적인 여러 요리에 적극 활용되고 발전했다기보다는 기존 요리에 소고기를 첨가하면 맛과 요리의 격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는 식으로 귀한 행사나 손님 접대에 쓰였던 것이다.

제주에도 소고기 요리로는 ‘쉐고기적갈’이라는 소고기 산적요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은 크지 않다. 소고기는 귀했기에 어쩌다 구하게 되면 보통 구이나 불고기, 아니면 푹 끓여 국물을 내는 것이 어디서나 비슷했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수원왕갈비통닭...”

천만관객을 훌쩍 뛰어넘은 코믹영화에 등장하는 대사다. 소고기 요리라 하면 소갈비도 물론 빼놓을 순 없다. 하지만 보통 ‘한우를 먹었다’는 말은 이제 전국 공통, 한우 구이를 먹었다는 말이 됐다. 그럼 또 어느 지역산 한우를 먹었는지가 우열의 관심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대표적 사례로 ‘횡성한우’등이 회자되기도 한다.

제주 흑우 _ 출처:문화재청

제주에는 다른 지역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제주 흑우’가 있다. 제주에 흑돼지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잘 알고 있는데 제주에 흑우가 있다는 사실은 아직 잘 모르는 이도 많다. 제주 흑우가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우선 그 희소가치만을 놓고 봤을 때, 제주 여행자들로서는 낯선 흑우를 한번쯤 맛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 흑우는 제주 사람들에게도 낯설다.

제주 흑우는 제주말로 ‘검은쉐’라고 한다. 하지만 별칭으로 ‘고생소’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납세의 종류는 크게 전세(田稅), 공납(貢納), 역(役)으로 나뉜다. 전세는 땅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땅 없는 소작농들이야 뭔 상관이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땅주인이 소작농들에게 세금 몫까지 포함시켜 소작료를 내게 했으니 사실상 가난한 민초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역도 만만치 않다. 군역을 지거나 평소 관(官)에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에 노동력을 제공했는데 이것 역시 문제됐던게, 이미 죽은 사람이나 아픈 이들, 도망친 이웃이나 친척 몫까지 떠안아야 했으니 이 역시 백성들의 어려움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또 공납이 문제였다. 공납은 지역마다 특산품을 한양 궁궐에 올리도록 했는데 이것을 ‘진상(進上)’이라 했다. 그런데 이미 그 지역 생산품이 아님에도 한양 도성에서 그 지역 특산품으로 지정해버리면 없는 생산품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니 이런 억지 세금이 백성들을 더욱 힘겹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억지를 쓰며 힘들게하는 사람을 ‘진상’이라고 부르게 된 어원이 거기서 비롯됐다한다.

육지와 다른 자연환경으로 제주에서만 나는 진상품이 많았고, 그것은 제주 민초들에게는 한결같이 버거운 것들이었다. 귤이 그러했고 전복이 그러했으며 말이 그러했다. 그리고 검은소가 그랬다.

제주 흑우 _ 출처: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

흑우 중에서도 제주흑우는 고기 맛이 우수해 고려시대 이래 삼명일(임금의 생일, 정월 초하루, 동지)에 제향, 진상품으로 공출하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온다. 또 중종 36년에는 ‘가뭄 피해가 극심하여 흑우가 병에 전염되어 죽으니 제사에 쓸 물건이 줄어들어 걱정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인조 5년에는 ‘병자호란 당시 금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백마와 흑우를 잡아 신의를 표하면 어떠한가를 논의한다’는 기록이 있고, 숙종 30년과 영조 38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 도움을 준 것을 기리는 제사에 흑우를 이용한다’는 기록도 있다. 또 영조 43년(1767)에는 ‘친경 때에 흑우를 사용하라(親耕時用黑牛)’는 어명을 내렸다. ‘친경’은 왕이 직접 논밭에서 소로 쟁기질을 하며 풍작을 기원하는 왕실 의식이었다. 이렇게 제주 흑우가 이곳저곳 왕실의 큰 행사에 쓰였으니, 정조 8년에 제주도가 심한 기근이 들었어도 다른 공물의 진상은 다 연기시켜 주었지만 흑우와 감귤, 말은 예외로 했을 정도다.(김민수 글 ‘제주의 검은 보물, 흑우를 담다’ 참고)

이렇게 귀한 제주 흑우를 제주의 백성들이 키우다가 자칫 잘못되면 어떻게 되었을까? 흑우를 키우던 이들이 물어내야 했다. 그런데 가난한 백성이 어떻게 이를 물어낼까. 물어낼 방법이 없다. 그러니 처음엔 부모를 팔고, 그 다음엔 아내와 자식을 팔며 결국엔 자기 몸까지 팔아 변제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영 목장의 경우에 키우던 흑우가 죽었을 경우 아내와 자식은 관비로 전락하는 일이 많았다한다. 그러니 제주의 백성들은 자기 집 소가 검은소로 태어나면 몰래 죽이기까지 할 정도였다한다. 이런 지경인데 제주 백성들이 검은소를 과연 얼마나 먹어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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