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양희의 수다 in jeju]- 돼지고기 이야기(1)
[류양희의 수다 in jeju]- 돼지고기 이야기(1)
  • 제주=류양희 통신원
  • 승인 2018.08.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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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들의 돼지고기 사랑은 유별나다. 제주사람들이 ‘고기’라고 하면 그건 곧 ‘돼지고기’다. 제주엔 소고기, 닭고기 심지어 말고기까지 있고, 하다못해 물고기도 흔한데 유독 돼지고기에만 ‘고기’라는 명칭을 부여할 정도로 일상적으로 가장 친숙한 육류다.

그래서 제주엔 돼지고기 관련 음식이 많다. 오겹살근고기, 돼지고기 수육인 돔베고기, 수육을 국수에 얹은 고기국수, 콩나물과 버섯에다 새콤달콤한 양념국물을 부어 철판에 익혀내는 두루치기 등이 흔하다. 순대국, 돼지국밥, 감자탕 등은 일반적인 음식들이긴 하지만 워낙 돼지고기 사랑이 각별한 제주사람에겐 육지사람보단 더 친숙한 음식들이면서 그 어느지역보다도 발달돼 있다. 근래에는 ‘돈까스’마저 유별나게 유행했다.

돼지갈비뼈로 국을 끓인 ‘접짝뼈국’이나 돼지고기와 순대를 삶은 국물에 모자반을 넣은 ‘몸국’은 이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래 소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제주에선 돼지가 그렇다. ‘돼지아강발국’이라고 해서 돼지족발탕까지 있으니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제주에선 왜 이렇게까지 돼지고기를 선호했던 걸까? 이 궁금증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왜 소고기와 말고기는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의문이 풀릴 것도 같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식용보다는 일을 부리는 게 주목적이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소를 잡는 것은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말고기는 더더욱 그렇다. 제주에서 기른 말은 군사용으로나 교통·통신 수단으로 국가적인 중요 자산이었기에 식용을 엄히 금했고 그것도 모자라 말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잔뜩 심어놓아 민간에서조차 자발적으로 금기시해 왔다. 이런 까닭으로 소고기와 말고기를 먹을수 없었으니 그 다음 선택은 당연스레 돼지고기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통계를 보아도 제주에선 돼지를 많이 길렀다. 강수경의 논문 ‘제주지역 돼지고기 음식문화의 전통과 변화’에서 언급한 ‘일제강점기 제주지방 행정사’의 내용을 인용해보면 이렇다.

‘일제강점기에도 양돈을 하지 않는 집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926년 양돈 사육 두수는 4만2857두에 달하고 있었으며 연간 2만5266두의 돼지가 도축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제주도내 양돈 규모를 추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어보는게 소원일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더욱이 육지보다도 더 척박했던 제주에서 어떻게 그리 많은 돼지를 기를 수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바로 제주의 ‘똥돼지’를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돼지는 잡식성으로 사람과 먹이 경쟁 관계에 있다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음식을 남긴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데 돼지 먹일게 어디 있었을까? 그러니 똥을 먹이는 거다. 싱싱하게(?) 방금 생성된 인분은 돼지에게 훌륭한 먹이였다.

◇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신선하게(?) 방금 생성된 인분은 돼지에게 훌륭한 먹이였다. 사진은 제주 민속촌에서 본 제주 똥돼지 모습.

지금의 위생 관념으로는 혐오스럽기까지 하지만, 사실 이것은 제주만의 특징은 아니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논문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이렇다.

‘석주명에 의하면 인분을 돼지의 먹이로 하는 방식은 한반도에서는 북으로부터 회령, 양구, 통영, 거창, 합천, 광양의 여러 지방, 내몽 서부, 산동성 전부, 산서성 동·중부, 만주 용정, 류큐 전부, 비율빈(필리핀) 전역에서도 나타났다. 데이비드 네메스에 의하면 지역은 더욱 확대된다. 인분을 돼지먹이 형태로 이용하는 것은 적도지역인 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 아메리카, 중국 동쪽지방 유구성 지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형태라고 하였다.

농촌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돗통시는 생태순환론적 시스템 장치였다. 인분과 음식물 쓰레기를 먹이로 하는 돼지, 또 돼지의 거름 생산과 돼지의 거름을 이용하여 농작물의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이는 곧 돗통시는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중략)

돼지거름이 질소, 칼슘 특히 말이나 소 거름에 비해 인산이 풍부하다. 이것은 제주도 같이 인산이 부족한 토양에서는 중요하다. 즉 돼지거름은 농작물뿐만 아니라 농지의 지력 상승 효과도 있었다.’

제주사람들은 소나 말과는 달리 쉽게 식용으로 전환이 가능한 고기로, 인분으로라도 기를수 있는 돼지 한두마리를 길렀다. 양돈을 했다고는하나 지금의 공장식 축산과는 전혀 개념이 달랐다.

게다가 전통 재래돼지는 지금처럼 거대한 몸집을 갖고 있는 돼지들과는 전혀 딴판의 작은 돼지였다. 아주 큰 돼지라고 해봤자 60kg정도였다고 하니 겨우 100근 정도되는 것이다. 그나마도 보통의 경우 24~38kg 내외이며 몸길이도 약 40cm 에 불과했다고 앞의 논문에 언급된 것을 보아서는 요새 25~30kg 내외로 개량한 애완용 미니돼지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지금 중형종인 버크셔가 대략 250kg내외이고 대형종인 요크나 랜드레이스의 경우 300kg내외인 것에 비하면 이러한 작은 돼지는 기르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먹이를 많이 축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먹을 것 자체가 귀했던 옛 시절이라면 이런 작은 돼지도 예외가 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집집마다 이런 돼지를 쉽게 잡지 않고 한두마리 정도 아껴 둔 것은 제주의 혼례나 상례, 기제사와 차례 같은 큰 가족의례 때 이 돼지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한 집이 혼례나, 상례, 기제사나 기타 의례가 발생하면 그동안 아껴둔 돼지를 잡는다. 그런데 돼지 100근을 한 집에서 다 처리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시대엔 냉장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고기가 상하기 전에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는 돼지를 잡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그 고기를 나눠먹는 것이다.

이 과정을 ‘돗추렴’이라 불렀다한다. ‘돼지품앗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그러니 그 품앗이를 갚기 위해서라도 쉽게 돼지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돼지를 안잡을수 없을 만큼 먹을게 급해지더라도 며칠만 더 참으면 이웃집 제사라 고기를 먹을수 있게 되는 것이니 버틸수 있었다.

마을에 여러집이 모여 사는 것은 당연한 거고 집집마다 의례날이 다 다르니 그렇게 본다면 마을에서 ‘돗추렴’은 자주 일어나는 행사이고 그에 따라 분배받은 돼지고기로 집집마다 이러저러한 요리를 해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제주에선 돼지고기 관련 음식들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모로 참 아름다운 전통이다. 물론 전통 자체도 아름답지만 제주의 돼지고기나 수많은 돼지고기 요리들을 생각해볼때 이 전통이 없었더라면 어쩔뻔했느냐고 굳이 말하는건 너무 노골적이라 애써 삼가겠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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